[채규만 박사] 건강한 이민 가정 칼럼 (16) 가족 시간의 재발견

건강한 이민 가정 칼럼 (16)

가족 시간의 재발견

채규만 박사 (임상심리학자 · 목사 · 상담자)

시카고 이민 가정의 아침은 유난히 분주합니다. 새벽같이 출근하는 아버지, 직장과 가게 일을 병행하는 어머니, 학교와 학원, 과외 활동, 운동과 교회 활동으로 빼곡한 아이들의 일정 속에서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이 정작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집니다. 어느 가정에서는 일주일 내내 식구가 다 함께 식탁에 앉는 일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이민이라는 삶의 무게가 우리에게서 가장 먼저 빼앗아 가는 것이 바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친밀함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오늘은 바쁜 이민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가족 시간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가족 시간 만들기

많은 부모님이 "시간이 나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민 생활에서 '시간이 나는' 날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습니다. 가족 시간은 남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따로 떼어 두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시카고 북서쪽에 사는 김 집사님 부부는 식당을 운영하느라 늘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부 상담 중에 한 가지 작은 약속을 정했습니다. 매주 화요일 저녁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텔레비전과 휴대폰을 끄고 온 가족이 거실에 모이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 달이 지나자 중학생 아들이 먼저 "화요일 가족 시간 언제 시작해요?"라고 묻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달력에 표시된 작은 약속 하나가 가족의 리듬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바쁜 가정일수록 가족 시간을 '계획'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하루 십오 분이라도 좋습니다. 아침 식사 전 짧은 기도, 잠들기 전 아이 방에서의 짧은 대화, 주말 아침의 산책 한 번이 쌓이면 가족은 다시 연결됩니다.

함께하는 식사의 중요성

식탁은 가정에서 가장 강력한 만남의 장소입니다. 음식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루를 나누고, 마음을 나눕니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횟수가 많은 청소년일수록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학업 성취도가 높으며, 위험 행동에 빠질 확률이 낮다는 결과가 일관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고등학생 딸을 둔 박 권사님은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대화가 완전히 끊겼다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런데 변화는 의외의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 어머니가 딸이 좋아하는 김치전을 부치면서 "같이 먹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없이 먹기만 하던 딸이, 몇 주가 지나자 식탁에서 친구 이야기, 학교 이야기를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캐묻지 않고 그저 함께 먹는 시간이 닫혔던 마음의 문을 천천히 열어 준 것입니다.

매끼를 함께하기 어렵다면, 일주일에 두세 번이라도 '온 가족이 같은 식탁에 앉는 식사'를 정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시간만큼은 휴대폰을 식탁에서 멀리 두고, 서로의 눈을 보며 "오늘 어땠어?"라고 물어보십시오. 음식보다 더 귀한 양식은 함께 나누는 마음입니다.

가족 전통과 의식 만들기

이민 가정에는 두 개의 문화가 흐릅니다. 부모가 가져온 한국의 전통과, 자녀가 자라나는 미국의 문화입니다. 이 둘을 억지로 한쪽으로 통일하려 하기보다, 우리 가족만의 고유한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지혜로운 길입니다. 어느 가정은 추수감사절에는 미국식 칠면조 요리와 함께 잡채와 갈비를 상에 올리고, 식사 전에 가족이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해에 감사한 일을 나눕니다. 또 다른 가정은 매년 첫눈이 오는 날 저녁이면 다 함께 떡국을 끓여 먹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자녀들이 자라 집을 떠난 뒤에도 "첫눈 오면 떡국 끓여 먹던 거 생각난다"라며 부모에게 전화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의 가족 영화 시간, 생일마다 직접 쓴 손편지를 읽어 주는 일, 주일 예배 후 함께 떠나는 짧은 나들이 같은 작은 의식들이 자녀의 기억 속에 "우리 가족"이라는 든든한 정체성을 새겨 줍니다. 특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쉬운 이민 2세 자녀들에게, 반복되는 가족 의식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뿌리가 되어 줍니다.

각자의 스케줄 존중하면서 연결되기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모든 일정을 정하지만,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친구 관계, 동아리 활동, 아르바이트로 아이의 세계가 넓어지고, 부모가 "오늘 저녁 가족 모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하면 오히려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대학생 아들을 둔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들이 집에 와도 방문을 닫고 있어 서운했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왜 가족과 시간을 안 보내느냐"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상담을 통해 접근법을 바꾸셨습니다. 아들의 일정을 존중하되, 일주일에 한 번 아들이 가능한 시간을 직접 정하게 한 것입니다. 강요가 아니라 초대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스스로 "수요일 저녁은 괜찮아요"라고 정해 주었고, 부자가 함께 농구 경기를 보러 가는 시간이 두 사람 모두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연결의 핵심은 통제가 아니라 존중입니다. 각자의 일정을 인정해 주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는 것입니다. 가족 단체 채팅방에 짧은 안부를 남기고, 떨어져 있어도 하루 한 번 따뜻한 문자를 보내며,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을 미리 의논해서 정하는 것이 모두 존중에 바탕을 둔 연결입니다.

질적인 시간 vs 양적인 시간

"우리 가족은 늘 한 집에 있는데 왜 멀게 느껴질까요?"라고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집에 있는 시간(양적인 시간)이 많다고 해서 마음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거실에 있어도 각자 휴대폰만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질적인 시간이란, 짧더라도 서로에게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하루 십오 분이라도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이의 눈을 보며 "오늘 가장 속상했던 일이 뭐였어?"라고 진심으로 물어보는 시간이, 텔레비전을 함께 켜 둔 채 보낸 세 시간보다 훨씬 깊은 친밀함을 만듭니다.

물론 양적인 시간도 중요합니다. 함께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질적인 순간도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한 이민 가정이라면, '얼마나 오래'보다 '얼마나 깊이'에 먼저 집중하시기를 권합니다. 부모가 피곤에 지쳐 형식적으로 곁에 있어 주는 것보다, 짧지만 진심으로 집중하는 시간이 자녀의 마음에는 훨씬 크게 남습니다.

나가는 말

성경은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로새서 3 23)고 말씀합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역시 마음을 다해 정성껏 가꾸어야 할 거룩한 영역입니다. 이민의 고단함 속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가족입니다.

오늘 저녁, 거창한 계획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식탁에 둘러앉아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한 사람씩 물어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가족의 시간은, 사실 우리 손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