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만 박사] 건강한 이민 가정 만들기 (17) — 사과하고 용서하는 가족

채 규 만: 한국 및 미국 임상심리 전문가, 가족 및 부부 상담가
"아빠가... 미안했다"
지난달, 한 어머니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저희 남편이 처음으로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결혼 25년 만에, 그리고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요." 그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 그리고 자녀가 성인이 되기까지 걸린 그 긴 시간이, 우리 이민 1세 부모들이 자녀에게 사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은 가정 상담 현장에서 자주 마주하는 주제, "부모의 사과와 용서"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례: 명수 씨 가족 이야기
명수 씨(가명, 58세)는 시카고 근교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두 자녀를 키운 이민 1세 아버지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한국에서 배운 대로, "아버지는 가정의 기둥이며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습니다. 아들 데이빗(가명, 32세)이 상담실을 찾은 이유는 우울감과 아버지에 대한 오래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시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화가 나서 저를 심하게 몰아붙이신 적이 있어요. 나중에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아버지도 아셨는데,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셨어요. 그냥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밥을 차려 주셨어요." 명수 씨에게 이 사건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가 부모인데 왜 사과를 해요?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한 건데."
이 짧은 문장 안에, 우리 이민 1세 부모들이 공유하는 깊은 신념 체계가 담겨 있습니다.
- "내가 부모인데 왜 사과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한국의 전통적 가족 문화에서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유교적 효 사상 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사과한다는 것은 권위의 상실로 여겨졌고, 이는 이민 1세대의 정서 구조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민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언어 장벽, 경제적 압박, 사회적 고립—은 부모의 정서 조절 능력을 소진시켜, 자녀에게 감정을 쏟아붓고도 이를 되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게 만듭니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전두엽(합리적 사고와 자기 성찰을 담당하는 뇌 부위)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편도체(위협 반응을 담당하는 부위)를 과활성화시킵니다. 즉,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민 1세 부모들의 뇌는 자기 성찰보다 방어와 통제 모드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설명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할 때,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의 권위와 사과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가복음 10:43)라고 말씀하시며, 진정한 권위는 섬김과 낮아짐 속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모가 사과하는 것은 권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숙한 권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부모도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기
가족치료학자 존 가트맨(John Gottman)의 연구에 따르면, 관계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 이후에 어떻게 회복하는가(repair attempt)"입니다. 건강한 가정은 갈등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갈등 이후 회복의 기술을 가진 가정입니다.
명수 씨와의 상담에서, 저는 그에게 작은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아드님께 그날 일에 대해 딱 세 문장만 말씀해 보세요. '그날 아빠가 너무 몰아붙였다. 오해였는데 확인도 안 하고 화를 냈다. 미안하다.'" 명수 씨는 몹시 어색해했지만, 다음 상담 시간에 이렇게 전했습니다. "말하고 나니 제가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들이 저를 안아줬어요."
사과는 자녀 앞에서 부모가 작아지는 사건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사건입니다.
- 자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 보여주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화해의 기술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장 귀한 정서적 유산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사과하는 모습을 통해 "실수해도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반대로, 사과 없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에게 사과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 부모의 패턴을 그대로 대물림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대 간 전수되는 정서적 패턴, 즉 가족치료에서 말하는 "가족 투사 과정(family projection process)"입니다.
효과적인 사과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하는 것("내가 그때 너의 말을 듣지 않고 화부터 냈다"). 둘째, 그것이 자녀에게 준 영향을 인정하는 것("그래서 네가 많이 상처받았을 것 같다"). 셋째, 관계 회복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앞으로는 먼저 물어보도록 노력하겠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사과는 진정성 있는 회복의 다리가 됩니다.
- 완벽한 부모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충분히 좋은 부모(good enough parent)"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완벽한 부모가 자녀를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실수하되 그것을 회복할 줄 아는 부모가 자녀의 정서적 회복탄력성을 길러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실수는 용납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어, 성인이 된 후에도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성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린도후서 12:9).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는 감추어야 할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민 1세 부모님들께 이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완벽하지 못함이 오히려 자녀에게 은혜를 가르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 회복탄력성 있는 가족 관계를 향하여
명수 씨 가족은 이후 몇 달간 상담을 이어가며, "우리 가족의 사과 언어"를 새롭게 배워갔습니다. 명수 씨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에게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사과하는 법을 몰랐던 것 같아요. 이제라도 배우고 있어요." 데이빗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회복되어 갔습니다.
회복탄력성이 있는 가족은 완벽한 가족이 아니라, 상처가 생겨도 다시 봉합할 줄 아는 가족입니다. 사과와 용서의 언어는 하루아침에 배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먼저 작은 한 걸음—"미안하다"는 짧은 한마디—을 내딛을 때, 자녀의 마음속 오래된 벽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번 주, 여러분의 자녀에게 오래전 못다 한 한마디를 건네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 한마디가 자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치유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18. 갈등을 대화로 풀어가는 가족"에 대해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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